남은 삶을 결정하기에 따라 치료는 달라
내가 레지던트일 때 30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간 파열로 응급실에 실려왔다.
쇼크 상태로 실려온 환자인데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복강에 피가 차올라 있었기 때문에 의료진들이 모여 응급수술로 지혈을 해서 살려놨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바로 검사는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혈압이 오르고 상태가 호전된 다음 검사를 실시했는데 간암으로 인한 간 파열 진단이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간염에 걸렸던 것이 원인인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 환자는 내과에서 항암 치료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그는 회복 후에 다른 적극적인 치료는 하지 않고 가족들과 여행하면서 삶을 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가족들과의 여행 후에 상태가 확 나빠져서 병원으로 온 환자는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일반 병실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떠나갔다.
그날 2만 볼트에 감전되어 응급실에 실려온 사람을 비롯해 하룻동안 3명에게 사망 진단을 내렸던 날이라서 또렷이 기억에 남는 사례다.
암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환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경험이다.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꿔놓는다. 더군다나 젊은 날의 암 진단이라면 더욱 그렇다.
30대에 죽는다는 건 현대에는 드문 일이지만, 죽음 자체는 드문 사건이 아니다. 아들딸의 불치병 진단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버릴 것이다.
병명을 들었을 때 너무 충격적이어서 뇌파가 일시 중단되면서 이상 증상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을 ‘심인성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졸도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암으로 보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환자는 바로 전날까지 살아왔던 삶과 앞으로 살아가게 될 삶 사이에서 엄청난 간극을 느끼지 않을까.
폐암 선고를 받은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숨결이 바람이 될 때’라는 책에서는 암 환자의 물리적 고통과 심리적 갈등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
항암 치료를 할 것인가, 여명치료를 할 것인가,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혼란스러울 때 의사이자 환자였던 글쓴이의 생과 사를 대하는 모습에서 많은 걸 생각해 볼 수 있다.
글쓴이 폴 칼라니티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은 전도유망한 레지던트였다. 혹독했던 10년의 수련 기간을 버티고 레지던트 생활을 열다섯 달 남겨둔 때에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체중 감소, 전에 없었던 요통이 찾아온 후 가슴에 통증을 여러 차례 느끼면서 기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폐암 진단을 확정받고 나서 그는 발밑의 땅이 흔들거리고 꺼지는 듯한 느낌이
었다고 고백한다. 암 진단을 받고 나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죽음 없는 삶이란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시한부 선고와도 같은 암 진단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치료 가능한 변이 EGFR 진단을 받고 하얀 알약 타세바를 복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암 진단을 받으면 일을 아예 그만두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일에 몰두한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짜는 것이 쉬울 테지만, 의사도 통계를 말할 수 있을 뿐 그걸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남은 시간이 10년이냐, 2년이냐, 두 달이냐에 따라 인생의 계획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면 계획 수립은 난감해진다.
폴 칼라니티는 남은 신경외과의 과정에 다시 뛰어들면서 수술과 환자를 책임지기 시작하고 결국엔 수료식만을 남겨둔다.
그러나 또 다른 암 덩어리가 발견되면서 항암 치료가 시작되고 그는 ‘신경외과의’라는 인생 계획을 내려놓고 글쓰기를 택한다. 환자는 암 진단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설사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초기 암 환자라면 오히려 남은 삶을 사는 동안 생활습관이나 가치관을 바꾸는 기회를 얻기도 하지만, 전이암 환자라면 얘기는 또 다르다.
폴의 항암 치료 효과는 다음날 바로 나타났다. 아주 피곤했고 온몸이 나른했다. 즐거웠던 식사는 바닷물을 마시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며칠이 지나자 텔레비전 시청과 억지 식사가 주요 일과가 되었다. 불쾌감은 점차 줄었고 다음 번 약물 주사를 맞을 때가 되자 몸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지만, 이런 과정은 되풀이되었다. 사소한 합병증으로 병원을 드나들었고 복직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얼마 후 익숙한 메스꺼움과 달리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녹색담즙을 토하고 응급실로 간 폴은 3차 치료제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무리한 치료보다 옹알이하는 딸과 놀 수 있는 쪽을 선택한다.
죽음이 더 확실히 빠르게 찾아올지라도 연명을 위한 공격적 조치를 거부한 것이다. 현대인의 암 투병은 긴 여정이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어떤 치료법들이 새로 등장할지 알 수 없는데다가 개인마다 질병의 양상은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자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기에 따라 치료는 달라질 수 있다. 맑은 의식을 포기하더라도 연명치료를 선택할지, 삶의 질에 의미를 두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지는 의사나 과학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글, 사진=서울하이케어의원 김태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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